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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암살범 오스왈드 죽음 그리고 케네디 암살 음모론들


사진이 많아 로딩이 깁니다.. 

잠시 기다렸다 내려가세요

1963년 11월 22일 오전 11시 38분. 텍사스주 달라스공항에 대통령 전용기가 착륙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한 사내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합중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퍼스트 레이디 재클린 케네디였다. 그들은 텍사스주에서 불거진 민주당 내의 다툼을 중재하고, 떨어진 지지도를 회복하기 위해 텍사스를 방문하고 있었다. 22일은 덜레스 방문 등을 포함한, 꽉 찬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날이었다.

덜레스에서의 일정은 단순했다. 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시민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주는 일이 고작이었다.

카퍼레이드에 쓰일 차량으로 1961년형 링컨 콘티넨탈을 오픈 탑으로 개조한 퍼레이드 전용 리무진이 채택되었으며 당초 관할의 달라스 시 경찰본부와 '시크릿 서비스(국가 요인에 대한 미국의 비밀경호관)'의 저격이나 투석 등에 대비한 투명 방탄 커버를 오픈 탑에 씌운 다음 퍼레이드를 실시하자는 권고에도 불구 다음 해에 열릴 재선을 향한 선거를 목전에 두고 국민에 대해 친해지기 쉬운 이미지와 의연한 이미지를 어필하고 싶었던 케네디와 측근들로 인해 방탄 커버 사용의 제안이 묵살되었다.

시계가 12시 30분을 가리킬 무렵, 그들을 태운 리무진은 엘름가(街)로 향하는 커브 길에 접어들었다.



차는 시속 16㎞ 정도로 속력을 낮추었다. 그리고 다시 직선코스로 들어섰을 때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고 군중을 상대로 손을 흔들던 대통령이 쓰러졌다. 영부인 재키는 차에서 도망치기 위해 차 위로 기어올랐고, 차 주변에 있던 시민들도 급히 엎드렸다. 대통령 방문에 환호를 보내던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단 6초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앞좌석의 존 코널리 주지사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아내가 그를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올리듯이 한 것이 직접적으로 폐에 공기가 유입되고 있던 것을 막아주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나 케네디는 머리에 총격을 받아 즉사하고 만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대통령이 총에 맞은 사실을 확인하자 리무진은 속력을 높여 인근의 파크랜드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들은 대통령을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총상으로 머리의 4분의 1 정도가 날아간 대통령을 되살리긴 어려웠다. 응급실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고 의사들의 이마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시계가 1시를 가리킬 무렵, 의료진의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대통령의 얼굴 위로 하얀 천이 덮여졌다. 46세의 젊은 대통령이 사망한 것이었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텍사스주 법에 따르면 텍사스주에서 사망한 사람의 부검은 텍사스 안에서 행해져야 했다. 그러나 케네디의 시신은 부검이 이뤄지는 시체 안치소로 향하지 않고 공항으로 이송되었다.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텍사스주 검시관이 법에 따를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일련의 작업이 속속 진행되었다.

케네디의 시신이 병원을 출발해 2시 18분 비행기에 안치되었다. 2시 31분, 미국 정부는 케네디의 죽음을 공식 발표했고, 2시 39분, 혼잡스런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린든 존슨 부통령은 급히 달려온 사라 휴즈 연방 판사를 앞에 두고 36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2시 47분, 대통령 전용기는 전(前) 대통령의 시신과 현(現) 대통령을 싣고 워싱턴을 향해 이륙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케네디 암살 용의자가 리 하비 오스왈드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케네디의 시신은 부검을 위해 워싱턴의 베데스다 해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부검은 형식적이라 할 만큼 급하게 진행되었고 후에 많은 의혹을 낳았다. 부검이 끝난 후 케네디의 시신은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케네디 사체 부검을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시행했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국가원수가 암살당한 비상사태였다고는 하나 법을 어기면서까지 사체를 워싱턴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 일부에서는 케네디 사체를 워싱턴으로, 그것도 군병원으로 옮긴 까닭이, 케네디 부검에 보다 확실한 통제를 가하기 위해서였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이런 의심은 사체 부검 당시 군장성들이 부검을 시행하는 의사에게 일련의 압력을 넣어 정확한 부검을 방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증폭된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FBI에 따르면 케네디 암살은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었고 배후도 없었다. 극렬 공산주의자이자 자신의 감정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오스왈드가 홧김에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FBI는 오스왈드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증거를 속속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에 망명했던 적이 있었고, 덜레스 시내 한복판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옹호하는 전단을 나눠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FBI가 내놓은, 오스왈드의 과거 행적을 통해 그가 단독으로 미국의 최고 권력자를 암살했다고 믿었다.

 

 


케네디 암살범 오스왈드

그리고 이상한 점은 오스왈드가 소련에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냉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소련에 망명했던 자가 쉽사리 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짐 개리슨은 오스왈드가 CIA 요원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없이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케네디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承繼)한 린든 존슨은, 케네디의 뜻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천명함과 동시에, 미 고등법원 판사인 얼 워렌을 필두로 한 ‘워렌위원회’를 조직했다. 워렌위원회가 맡은 임무는 케네디 암살사건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었다.

10개월 동안의 조사 끝에 워렌위원회는 1964년 9월 27일, 케네디 암살 “사건은 오스왈드에 의한 단독 범행이며 오스왈드에게서도, 그를 쏜 루비에게서도 어떤 배후관계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그러나 워렌위원회의 공식적인 발표와는 달리 케네디 암살사건에는 풀리지 않는 여러 의혹이 있었다. 먼저 목격자의 진술과 수사결과가 일치하지 않았다. 목격자 대부분은, 총알이 오스왈드가 위치해 있던 텍사스 교과서 창고 쪽이 아닌 글라시노르 언덕에서 날아왔다고 증언했다. 또 어떤 이들은 글라시노르 언덕에서 총성을 들었고 화약 연기를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목격하고 그들을 추적하다 비밀요원들에게 제지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케네디가 저격당한 장소에서 볼 때 교과서 창고는 5시 방향에 위치해 있고 글라시노르 언덕은 1시 방향에 위치해 있다.

향이 앞과 뒤로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워렌위원회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교과서 창고에 있던 오스왈드를 암살범으로 지목했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파크랜드 병원에서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했던 의료진들이 목격한 케네디의 머리 상처와 워렌위원회에서 발표한 그것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 또한 의문점이었다. 파크랜드 병원의 의사들은 후두부, 즉 뒤통수에 큰 구멍이 있다고 한 반면, 워렌위원회는 정수리, 즉 머리 앞부분에 큰 구멍이 있다고 발표했다.

보통 총상은,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총알이 몸 안에 들어갈 때는 조그만 상처를 내나, 나올 때는 커다란 구멍을 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파크랜드 병원 의사들의 진술은 저격 장소가 전방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워렌위원회의 발표는 저격 위치가, 암살 당시 오스왈드가 위치해 있던 후방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그러나 FBI도, 워렌위원회도 이런 의문점을 묵과(黙過)했다. 그들은 리 하비 오스왈드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에게 모든 혐의를 씌웠다. 그러나 과연 오스왈드 혼자 케네디를 암살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여러 드러나지 않은, 혹은 FBI와 워렌위원회가 무시한 증거를 살펴보면 그가 단독으로 케네디를 암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워렌위원회와 FBI는 오스왈드를 단독범으로 지목하고, 배후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심지어 당시 증인들의 증언이 엇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워렌위원회는 오스왈드를 표적으로 삼은 듯, 그에게 불리한 증언만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여러 문서를 비밀문서로 만들어버렸다.

케네디 암살범과 암살사건에 대한 음모론은 아주 많다

 


케네디 암살범 / 케네디 암살

오늘날 케네디 암살을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또 케네디가 군산복합체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그리고 케네디 암살에 CIA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주장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케네디 암살에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장이 모두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여러 정황을 살펴봤을 때 군산복합체와 CIA의 냉전주의자들이 결탁해 케네디를 암살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지 그 확실한 물증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밀로 분류돼 있는 문서가 모두 공개되지 않는 한, 케네디 암살의 확실한 진상은 베일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누가, 왜, 어떻게 케네디를 암살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아쉽지만 2039년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리고 또 다른 썰

의혹, 그리고 반론

· 오스왈드가 최초로 목격된 것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두 번째 층 간이 식당에서 교통경찰관

마리온 베이커리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감독관 로이 트룰리에게 목격된 것인데 시간상으로 가능한가

- 공식 조사위원회인 워런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조사위원과 마리온 베이커리, 로이
트룰리의 여러 번의 시간 테스트 결과 오스왈드가 6층에서 저격 후 총을 숨기고
마리온 베이커리와 로이 트룰리 보다 앞서 2층으로 내려오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짐

· 오스왈드가 케네디 암살이 있던 순간 간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

- 사실무근이며 오스왈드가 케네디 저격이 있은지 2분 후 2층 간이식당의 자판기

앞에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 것이 로버트 리드 부인과 서기 감독관에게 목격되었을 뿐

· 케네디의 시신을 본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의 의사들은 케네디가 앞쪽에서 총을 맞았다고 하였으나

이후 공식적인 부검보고서를 작성한 해군 병리학자는 뒤에서 총을 맞았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 케네디가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후송되었을 때 의사들은 대통령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며 케네디는 내내 하늘을 본채로 똑바로 누워 있었다

이 때문에 목 뒤의 관통된 총상을 보지 못했던 의사들은 케네디가 앞쪽에서 총격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고 이후 부검보고서를 접하고는 앞쪽의 총상이 입구가 아닌 출구라는 것에 동의하였다

· 케네디 암살 순간 비 오던 날씨가 개었는데도 차량 오른편에 검은 우산을 펼친 채 서 있는

남자가 있었는데 이 미스터리한 '엄브렐라 맨(The Umbrella Man)'의 정체는 무엇인가

- 날씨가 개었는데도 불구하고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는 미스터리하게 비추어졌으며 특히

음모론 옹호론자들과 로버트 커틀러의 '우산으로 꾸민 다트 독살설'로 인해 더욱 미스터리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엄브렐라 맨은 1974년 열린 하원 암살 청문회에 나와 자신의 이름이 루이스 위트이며

당시 가지고 펼친 채 들고 있었던 우산을 공개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주장에도 일부

음모론 옹호론자들은 우산살의 개수가 맞지 않다는 억지를 쓰기도 했다

· 케네디 암살 직후 3인의 부랑자가 달라스의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사진이 찍혔는데 이들 중 2명은

하워드 헌터(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도청팀의 책임자이며 CIA에서 장기간 근무했고 1961년 피그만 사건 때

망명 쿠바인을 이끌었다)와 프랭크 스터저스(한때 CIA에서 계약직으로 일했으며 하워드 헌터와 함께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도청을 시도하던 팀원으로 CIA, 마피아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알려짐)이며

이들이 케네디를 암살한 후 부랑자 행세를 하여 사건 현장을 빠져나간 것이다

이후 연행된 이 3인은 경찰에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경찰 또한 달라스 경찰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 모두 음모론 옹호론자들의 날조이며 이 사진은 케네디 암살 후 퍼레이드 근처

고가 철도의 기차에 3인의 부랑자가 숨어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마빈 L
와이즈 경관과 빌 베스 경관이 연행하던 순간이 기자들에 의해 찍힌 것이다

이후 이 3인의 부랑자들은 조사 결과 암살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고 그들은

각각 거스 아브람스와 해롤드 도일, 그리고 존 게드니라는 사람이었다

· 케네디가 목 부분에 총격을 받은 뒤 약 2초 후에 찍힌 사진에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건물의 계단에서 퍼레이드를 보고 있는 직원들 사이로 오스왈드가 찍혀 있다

- 그는 오스왈드가 아니라 같은 회사, 즉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직원인 빌리 놀란 러브레이디이다

심지어 사진엔 그의 원형 탈모가 고스란히 찍혀 있다

· 케네디 암살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촬영하던 스카프를 쓴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총소리가 난 후에도 전혀 패닉을 일으키지 않은 채 끝까지 촬영하였다

이후 이 여인은 달라스 시내의 Colony Club이라는 오스왈드를 암살한 잭 루비의

술집 옆에 위치한 술집에서 일하던 스트립 걸 비벌리 올리버로 그녀는 자신이 찍은

  '가장 가까이서 촬영한 케네디 암살 필름'을 케네디 암살 3일 후 자신이 일하는

클럽으로 찾아온 2명의 남자에게 넘겨 주었으며 그 중 한 명은 FBI 뉴올리언스

지부의 레기스 케네디였고 그는 마피아와 가까웠던 사람이었다


- 일단 스카프를 쓴 여인을 칭하는 'The Babushka Lady'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러시아어로 할머니, 또는 늙은 여인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이 여인이 마치

러시아의 할머니처럼 노인이 착용하는 스카프와 옷차림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그녀가 총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녀 외에도 본능적으로
끝까지 촬영한 사람들이 있으며 대표적으로 케네디가 총격을 입은 뒤 차량이 속력을 내
터널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흔들림 없이 촬영한 Abraham Zapruder가 있다
  (이후 그의 이름을 딴 Zapruder Film은 케네디 암살의 중요한 증거물로 사용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유명한 8mm 필름이자 라이프 잡지사에 15만 달러에 팔린 필름이기도 하다)

한편, 자신이 The Babushka Lady라고 주장한 비벌리 올리버는 당시 17살이었으며
그녀가 촬영하는 데 사용했다고 주장한 Super-8 Yashca는 1967년까지 존재하지 않던
모델이었으며 그녀가 사건 당시 있었다고 말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하였고 그녀는 단지 자신의 회고록을 출판하기 위해 그러한 주장을 한 것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필름을 넘겨 주었다고 주장한 레기스 케네디는 그녀가 주장한 날에

뉴올리언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저녁에는 딘 앤드류스라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케네디 암살 현장을 필름으로 담은 묘령의 여인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 오스왈드를 암살한 잭 루비는 마피아와 CIA, 그리고 달러스 경찰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직접적으로 케네디 암살에 연관이 있었거나 사주를 받아 오스왈드를 암살한 것은 아닌가

- 케네디 암살과 관련해 모든 음모론자들이 잭 루비를 마피아, CIA, 달러스 경찰서와

모종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거나 오스왈드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음모론자들을 제외한 잭 루비의 지인들과 공식적인 조사에서 그는

힘 있는 마피아의 정식 일원이 아닌 체포되기를 반복하는 스트립 클럽의 잡범으로 알려졌다

그가 달라스 경찰들과의 연줄로 인해 당시 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오스왈드를 향해 자유롭게 총을

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폭행, 주류법 위반, 자신의 가게에서 이루어지는 외설행위들로 인해

빈번하게 체포되었었다, 우리는 잭 루비의 거대한 커넥션에 집중하기보다는 당시 경찰서 뒷마당에서

오스왈드를 이송하며 경비를 허술하게 한 달라스 경찰서의 안일함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한편, 그는 주변인들로부터 싸이코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적이고 조울증이 심한 사람이었는데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자기 클럽의 공연을 취소시키고 매우 화가 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슬퍼하는 재클린 여사와 아이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오스왈드를 암살했다고 밝혔으나 이후

영웅으로 떠받들어 짐과 함께 많은 돈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자신의 변호사에게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또, 오스왈드를 암살한 후 조수검찰에 '자, 너희들이 그것을 할 수 없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나, 그 개자식이 내 대통령을 살해했어'라고 말한 잭 루비는 사형이 언도되자

음모에 휘말렸다며 자신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게 거짓말 테스트를

끈질기게 요구해 결국 테스트가 이루어지지만 뻔한 결과가 나오고 만다

사실, 그가 오스왈드를 암살했을 때 달라스 경찰 본부 밖의 군중들은 소식을 듣고

박수를 터뜨렸으며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각지로부터 많은 응원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한편, 그가 진실을 말하려고 하자 암세포를 투입시켜 암살시켰다는 음모론이 있으나 사실 그는 많은

인터뷰를 했으며 임종순간에도 자신의 변호사와 동생과 인터뷰를 하였고 자신은 오스왈드를 사건 전엔

전혀 알지 못했으며 화가 난 상태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를 향해 총을 쏜 후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많은 음모론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4년간 많은 인터뷰를 해오면서 어떠한 음모도 말한 적이 없다

  (한편, 그가 오스왈드를 암살하는 순간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타며 큰 충격을 주었다)

마법의 총알(Magic Bullet), 그리고

케네디 암살 사건과 관련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법의 총알(Magic Bullet)이다.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 창문에서 쏜 단발의 총알로는 케네디와 앞좌석의 코널리에게 총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히기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오스왈드의 군시절 형편없던 사격솜씨로는 케네디의 머리에

정확히 저격할 수 없으므로 제2, 제3의 장소에서 오스왈드와 함께 케네디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저격범들과 케네디 암살을 주도한 배후가 있다는 것이 미국 국민 74퍼센트의 견해이다.

(배후에는 해체의 두려움과 피그만 작전의 책임 전가, 그리고 가짜 테러를 일으켜 쿠바와 공상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명분을 만들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CIA, 케네디가 대통령 당선 전과 후 가장 많은 힘을 빌린

자신들에게 그의 동생이 단속을 강화하며 뒤통수를 치자 분노한 마피아, 피그만침공 음모 실패로

케네디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반카스트로파 망명 쿠바인들, 이러한 쿠바인들을 이용해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스트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닉슨이나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쿠데타,

전쟁 특수를 타고 호황을 누리다 베트남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우던 케네디에 분노한 군산복합체, 냉전 시대

미국과 함께 주역이었던 소련, 연방준비제도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한 케네디를 '처단'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심지어 외계인의 존재를 밝히려고 했던 케네디를 암살한 외계인과의 협상을 전담하는 비밀방위위원회인

MJ-12와 빼놓을 수 없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음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모론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오스왈드가 절대로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쏜 총알이 케네디를 맞혔을 수 없으며

때문에 단독범의 소행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말대로 음모의 희생양이었다고 굳게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네디 암살 직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린든 존슨이 케네디 암살 사건의 의혹과 전모를 밝히기 위해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워런을 위원장으로 8명의 위원, 즉 워런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케네디 암살 1주일
후에 만들어진 이 위원회는 1964년 9월 27일까지의 조사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 발표한다.

하지만 당시 위원회원들이 CIA 출신이거나 공화당 소속으로 애초 오스왈드를 단독범으로 지정해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의견과 많은 음모론 옹호자들의 마법의 총알 주장, 그리고 1975년 이러한

여론으로 인해 케네디의 암살 현장을 담은 Zapruder Film이 처음으로 TV를 통해 전국방송 되었고

끔찍한 참상을 그대로 담아낸 필름의 힘이 더해져 1976년 9월 또 하나의 논란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에 대한 조사를 케네디 암살 사건 재조사를 병행키 위해 하원 암살소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워런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했던 하원 암살소위원회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지만, 결론은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창고 보관소 6층에서 창문을 통해 3발의 총을

발사했으며 이로 인해 케네디가 암살되었다'라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으며 그나마

'오스왈드 외에 암살에 관련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그들의 견해가 다소 위안이 될 뿐이었다.

케네디 암살의 진실은

케네디 암살 사건과 관련해 음모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마법 총알이다.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쏜 총이 케네디의 등을 관통해 목으로 나온 뒤 갑자기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앞좌석 코널리의 오른쪽 겨드랑이 부근으로 들어가 그의 오른쪽 가슴 쪽으로

나와서는 오른쪽 손목과 부딪힌 후 차례로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총 두 사람에게서 일곱 군데의 총상(관통 두 군데, 총상 세 군데)을 남긴 것이야말로

오스왈드 단독범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동시에 케네디를 저격했음을 의미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데도 불구하고 워런 위원회와 하원 암살소위원회에선 오스왈드가 쏜 단발이 두 사람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남겼으며 뒤이은 한발이 케네디를 절명시켰다고 공통적으로 발표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데 이 마법의 총알이 사실은 아폴로 13호의 달착륙 조작설에 대표적인 증거물인 동시에

아폴로 13호가 당시 달에 실제로 착륙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처럼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홀로 3발의 총을 쏘았고 그 중 두 번째 총알이 두 사람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혔고 마지막 세 번째 총알이 케네디를 절명시켰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면 달착륙 조작설을 주장했던 음모론 옹호론자들이 대기가 없는 달에서 진자운동과

미리 준비해간 상단부분의 고정봉으로 인한 성조기의 모습을 바람이 부는 야외 세트장에서

촬영한 것이라는 무지에 의한(혹은 의도적인) 음모론 주장처럼 케네디 암살 음모론의

대표적인 증거인 마법의 총알 역시 무지에 의한(혹은 의도적인) 음모론 주장이다.

먼저 케네디의 등을 관통한 총알이 목 쪽으로 나올 수 없다는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케네디 검시 보고서의 그림을 증거로 하는데 사실 검시 보고서엔 비록 총상이

마치 등을 맞은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분명히 총알이 케네디의 귀 뒤 융기된 뼈

하단 14cm 지점을 관통했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검시 보고서를 그린 쏜톤

보스웰도 총상의 위치에 맞게 자세하게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날라온 총알이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는 오해는 풀렸어도 관통한
총알이 바로 앞좌석 코널리 주지사의 오른쪽 겨드랑이 부분을 관통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 역시 조악한 음모론일 뿐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음모론 옹호론자들(특히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에게 속은 것이다.

당시 케네디가 탑승한 1961년형 링컨 콘티넨탈을 오픈 탑으로 개조한 퍼레이드 전용 리무진은
음모론 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앞좌석과 뒷좌석이 서로 같은 높이에 수평 위치에 놓여 있지 않았다.

대통령을 위한 퍼레이드 차량인 만큼 뒷좌석이 더욱 눈에 띄도록
앞좌석보다 뒷좌석이 높고 바깥쪽으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인해 워런 위원회와 하원 암살소위원회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오스왈드가
쏜 단발이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에게 총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혔다고 발표한 이유다.

참고로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에서 차용된 제2, 제3의 저격범이 다른 곳에서 케네디를 저격했다는 음모론이
과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며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총상을 입혔다는 명백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케네디 암살의 음모론을 파헤치기 위해 첨단 소재를 사용해 사람 머리의 물리를
그대로 재연해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인공 인간의 머리를 만들었으며 케네디 암살 당시의 외부 조건과

동일한 탄도 테스트를 한 결과 영화 JFK에서처럼 차량 우측의 펜스 너머에서 케네디의 머리를 저격시켰다면
관통으로 인해 바로 옆에 있던 재클린 여사가 무사할 리 없다는 당연한 탄도 테스트가 나왔다.

이어 실제 오스왈드가 저격한 위치로 알려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과 동일한 위치에서 탄도
테스트를 한 결과 두개골이 관통되지 않은 채 케네디의 두개골과 동일한 형태로 총상이 생겼으며

혈흔 자국들의 위치와 당시 케네디 차량의 바로 뒤에서 오토바이로 경호하던 바비 하기스가
케네디 저격 순간 두개골 일부가 자신에게 튄 것과 동일한 현상 또한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케네디 암살 현장을 촬영한 Zapruder Film과 디스커버리에서 실시한 탄도테스트를
컴퓨터 작업으로 비교한 결과 오히려 오스왈드가 저격했다고 알려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의
위치 외엔 알려진 것과 같은 총상을 입힐 수가 없음이 밝혀졌다.

또한, Zapruder Film을 이용해 FAA라는 회사와 Dale Myers라는 애니메이터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당시 상황을
재연한 결과물은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저격을 한 것이 맞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1964년 실시된 FBI 총기 검사에서 오스왈드가 사용한 총은 최소한 재장전에 2.3초 정도가 필요하며

첫발이 이미 장전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4.5초 만에 3발의 총을 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역시 1967년 CBS에서 실험한 결과로 의문이 해소되었는데 11명의 실험자 모두

오스왈드가 사용했던 라이플과 동일한 종류의 총을 사전에 다루어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발의 총을 쏘는데(그중 첫발은 장전상태에서) 4.1초에서 6초 사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며 이후 Zapruder Film을 분석한 결과 첫 번째 사격이 조금 더 이른 시기로 추정돼

오스왈드에겐 적어도 5초 이상의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렇다면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힌 총알, 즉 증거자료 CE399의 총알이 도저히 사람의 몸을

관통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온전하여 깨끗한 총알(Pristine Bullet)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이것 역시 오히려 단발의 총알이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는데 해당 라이플에서 발사된 총알의 속도는 초속 2,000피트 정도라
코널리 주지사의 손목뼈와 부딪혔다면 심하게 일그러져야 하겠지만, 그전에 케네디의 몸을 관통한 뒤
코널리 주지사의 몸 또한 관통하며 총알의 속도는 절반 이상으로 떨어졌고 국제 총상 탄도 협회에서
오스왈드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총알로 초속 1,100피트로 실험한 결과 위 사진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참고로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 간의 총격에서 반응에 시간차가 있었던 것은 케네디의 경우 총격 시 충격이

운동신경을 자극하였고 코널리 주지사의 경우 폐를 관통하며 케네디보다 훨씬 느린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한다)

또,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를 관통한 마법의 총알은 깨끗한 총알, 혹은 온전한 총알로도
불리는데 음모론 옹호론자들에 의해 왼쪽의 사진처럼 한쪽 면이 찍힌 사진으로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이 깨끗한 총알, 즉 증거물 CE399는 결코 깨끗하거나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사진 왼쪽의 가장 깨끗한 단면을 찍은 사진이 주로 알려졌으나 그 반대 면을 보면 사실 변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의 몸을 관통한 뒤 손목뼈에 부딪혀 변형은 약하긴 하지만

이 증거물 CE399는 암살 당일 오후 1시 30분에서 2시 사이 경에 케네디가 후송된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에서 근무하던 다렐 톰린슨이 당시 엘리베이터 옆에 세워둔 들것에서
이 총알을 발견해 시크릿 서비스인 리차드 존센에게 전달하였고 리차드 존센은 다시
워싱턴에 돌아가 저녁 7시 30분경 상관인 제임스 롤리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임스 롤리가 저녁 8시 50분에 FBI 연구소에 넘겨 주었으며 이후 FBI 연구소에서
실험을 통해 오스왈드의 이탈리아제 라이플총에서 발사된 것임을 밝혀냈다.

(총알이 총구를 빠져나오며 생기는 나선형의 무늬를 비교하는 방법)

만약 음모론 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음모에 관련된 배후세력이 몰래 총알을 갖다 논
것이라면 누가 발견할지도 모를(혹은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를) 곳에 갖다 놓은 이유와
케네디와 코널리를 관통하여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형태의 모양이 된 총알을 준비하기보단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의 총알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또, 달착륙 조작설에서의 성조기 케이스처럼 뻔한 의심을 사려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다

참고로 코널리 주지사의 손목에서 발견된 탄환 조각과 이후 중성자 방사화 분석의 도입으로 인해
오스왈드가 쏜 단발에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가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었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케네디가 정말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저격당하였다면
어째서 앞에서 총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뒤로 젖혀졌는가?

이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적이 있는 물리학자 루이스 알바레즈가
1976년 발표한 제트 효과(Jet Effect)로 설명할 수 있다.

수박이나 멜론과 같이 딱딱한 겉면과 연한 내부로 이루어진 물체에 총을 쏘게 되면 총알이
관통되어 나오는 출구가 크게 손상되며 내부의 물질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순간 마치 제트기와
같은 추진력으로 인해 총알이 오는 방향으로 물체를 밀어낸다는 것이 제트 효과이다.

실제로 멜론, 수박, 백골로 실험한 결과 케네디와 동일하게 총알이 오는 방향으로 물체가 이동했다.

<케네디 암살 당시 오스왈드의 시선으로 어째서 첫발이 아닌 세 번째 발사가 가장 정확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정말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발사된 것인가? 그렇다면 'Grassy Knoll'은?

·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전방에서 발사된 총알에 암살되었다는 증거는 정말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 먼저 이러한 가설엔 치명적인 오류가 존재하는데 당시 퍼레이드에 사용된 차량 전면부에
운전석과 조수석에 탑승한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은 물론 뒷좌석의 코널리 주지사 부부와
케네디 부부를 커버할 높이의 차량 유리가 존재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그렇다면 전방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가설을 전제로 할 시 애초 이러한 차량 전면부의 유리와
케네디 앞좌석에 앉은 4명의 인원에게 어떠한 총상도 입히지 않고 케네디의 머리를 적중시키려면
차량을 기준으로 전면부가 아닌 각도상 사선에서 저격해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케네디가 머리를 저격당했을 때엔 그전의 총격으로 목을 움켜쥐며 고개를 다소 숙인 상태)


·

이 사진은 암살 당시의 차량 전면부 유리에 생긴 균열인데

분석 결과 유리 안쪽의 충격에 의해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전방의 총격으로 균열이 생겼다면 관통되었거나 총알이 이 균열
위로 지나가며 이같은 상처를 남겼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

먼저 차량을 기준으로 좌측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가설을 보면,

이 사진과 같이 전혀 엄폐할 곳이 없으므로 저격이 불가능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앞서 말한 차량 전면부 또한 당연히 엄폐할 곳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그래서 총이 전방에서 발사되었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이 만들어낸 가설이 'Grassy Knoll'인데

바로 차량을 기준으로 우측에 있는 작은 언덕 펜스 너머에서 케네디를 저격했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이 음모론은 사실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의 가장 대표적인 음모론이다)

· 하지만 이 가설대로라면 케네디 앞좌석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총상도
입히지 않고 저격에 성공하기 위해 이러한 각도가 되어야 한다

·

그러나 당시 Grassy Knoll에서 발사했을 가능성이 제로인

이유가 있는데,

바로 해당 언덕의 높이와 각도에서 발사했을 시 목에 총상을 입은 케네디
곁에 있던 재클린 케네디가 어떠한 총상도 입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디스커버리 채널의 실험을 통해서도 Grassy Knoll 가설을
테스트한 결과

재클린 케네디가 아무런 총상 없이 무사할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 마지막으로 당시 사건을 가장 먼저 조사했던 FBI, 그리고 공식위원회인 워런 위원회,
또 이들을 믿지 못했던 하원 암살소위원회 모두 오랜 기간의(FBI는 제외) 분석에서
모두 케네디가 뒤에서 총격을 받았다고 결론지었으며 특히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은
명백한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 하원 암살소위원회조차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케네디를 절명시킨 것은 확실하다고 결론 내렸다

· 물론 케네디의 두개골 X레이 등을 검시한 법의학자와 병리학자들

모두 케네디가 뒤에서 총격을 받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렇다면 리 하비 오스왈드의 혐의는 얼마나 정확할까

· 사격솜씨가 형편없었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그는 해병대 복무 중인 1956년 12월,
  200야드 떨어진 목표물에 총 50발의 사격을 실시해 49발을 명중시켰다

  (케네디 암살 당시 거리는 약 80야드)

·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발견된 라이플의 탄피 3개가 오스왈드의 라이플 것임이 밝혀졌으며

그가 암살에 사용한 라이플을 주문한 것이 확실하게 밝혀짐과 함께 총에서 손바닥 지문 일부가 발견되었다

· 비록 그가 암살에 사용한 총을 들고 있는 사진이 출판과정에서 총 부분을 선명하게 수정하느라 조작의혹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1963년 3월 20일부터 4월 24일간에 살던 집 뒷마당에서 자신이 살던 셋집의 부인에게

노동자와 투쟁이라는 신문과 암살에 사용된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 교통경찰관 JD 티피트를 권총으로 살해하는 것을 7명이 목격했으며 현장에서
체포 당시 그가 소유하고 있던 권총에서 발사된 탄피가 발견되었다

· 케네디 암살 당시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직원들은 위층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으며 암살 바로 직후 유일하게 무단으로 사라진 직원은 오스왈드뿐이며 그의 가정부는
그가 황급히 집에 들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 수분 후 다시 집을 나갔다고 증언했다

· 그가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은 오스왈드가 라이플총을 담요로 쌓아 차고에
넣은 것을 알았기에 곧장 차고로 가 확인한 결과 담요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남편이
암살범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경찰의 수색에서 남편의 총이 차고에 그대로 있으므로 범인이
아니라고 경찰을 차고로 데려가 담요를 보여주었지만 실제로 담요 안에 총은 없었고 그녀는 자신이
미처 담요 안을 확인하지 않았음을 알고는 남편이 암살범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 케네디 암살 직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 창문에서 총을 내밀고 케네디를 저격하는 암살범을
목격한 HL 브레난은 곧바로 그의 인상착의를 신고했고 이후 오스왈드가 맞음을 증언했다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째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것인가

· 그는 굉장히 복잡한 사람이며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다, 해병 복무 당시 동료 살해 혐의와 불법 총기

소지 및 발사 죄명으로 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가 하면 냉전 시대에 미 해병임에도 소련의

공산주의(정확히는 마르크스 주의)를 동경하는 등의 기행을 보이며 결국 불명예제대를 하게 되었

이후 일본 아츠기 기지에서 복무할 당시 배운 러시아어로 소련에 여행을 가 그대로 망명하였다

· 망명 당시 그는 미국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추방되는 것을 피하고자 자살시도를 한 끝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민스크에서의 생활을 허용받았고 TV 공장에서 일하며 소련 여성인 마리나와 결혼했다

· 소련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히며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에 여권을 반납하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고 했으며(이로 인해 이후 그가 CIA의 스파이여서 첩보 활동을 위해 위장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후 생각을 바꾸고 마리나와 딸을 데리고 1962년 미국에 귀국해 달라스 지역에 거주한다

· 1963년엔 우익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이며 2월에 'Operation Midnight Ride'라는
반공산주의 여행에 대해 전도자들에게 협력하기로 하며 신문 일면을 장식한
에드윈 앤더슨 워커 육군 소장을 표적으로 삼고 그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 그는 1월 통신주문을 통해 권총을 주문하는데 이어 라이플총을 주문하기에 이르렀고 직장에서 해고된 10일
후인 4월 10일 에드윈의 자택 부근 교회에서 예배를 하여 혼잡한 것을 파악하여 이날을 암살 계획 날로 잡는다

· 그러나 약 30m 거리에서 사격한 오스왈드의 총알은 창문으로 인해
그 궤도가 벗어나며 에드윈의 팔뚝에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난다.

· 당시 수사 당국은 에드윈 암살 미수범에 대해 파악을 하지 못했으나 이후 오스왈드가
자신이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아내에게 남긴 러시아어 메모 외에 자신의 계획을 적은
메모를 발견한 아내 마리나가 남편이 또다시 사람을 죽이려 할 때 경찰에 제출하고자
자신의 요리책 속에 숨겨둔 것이 케네디 암살 후 집안 수색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로 오스왈드가 케네디 암살 당시 사용했던 총알과 에드윈 암살 미수 사건 당시의
총알을 중성자 방사화 분석 한 결과 동일한 제조 업체에서 판매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 한편, 에드윈 암살에 실패한 오스왈드는 뉴올리언스로 거주지를 옮긴 뒤 카스트로
지원 단체인 쿠바 공정위원회에 참가하여 삐라를 배포하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 1963년 9월 27일엔 멕시코에 가 소련 대사관과 쿠바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의 정보를
미끼로 망명을 요구하나 상대되지 않았으며 이후 카스트로 지지자로 활동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반카스트로파의 활동가들과 자주 만나는 등의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

· 그는 자주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그만두면서 결혼 생활은 거의 파탄 나 일없이 무일푼인 상태였다고 한다

· 그가 케네디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카스트로
지지와 반카스트로파 또한 지지하며 이에 공통된 적대감을 받는 케네디가 에드윈 암살에 실패하였고

불안정한 현실에 처해있던 오스왈드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 한편, 케네디 암살의 음모를 다룬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의 이야기를 제공한 짐 개리슨은
오스왈드가 양성애자이며 완벽한 사람인 케네디를 시기해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잭 루비, 크레이 쇼, 페리 모두가 동성애자였으며 이들이 오스왈드와
함께 완벽한 남자인 케네디를 시기해 암살을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 어떻게 생각하면 어떠한 집단에 속하여만 안정을 취하는 그가 여러 곳으로부터 정착을
하지 못한 채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되도록 유명인사를 암살하는데 열중했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미국의 경우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유명인사의 암살기도를
하는 것은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니다